중국 당나라 말기 시인 온정균의 생활
온정균
812~870년 추정
그는 중국 당나라 시기에 병주 (幷州:山西省 太原)에서 몰락한 귀족의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용모가 특이하고 못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의 어머니가 혼자 많은 자식들을 돌보고 키우느라 궁핍하고 힘든 생활을 했다.
그가 힘든 생활을 이어 오던 중 그의 부친의 오랜 친구였던 단문창이 그를 두릉으로 데리고 와 자신의 아들과 같이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이 단문창의 아들을 잘 기억하자)
단문창의 아들과 같이 공부하며 생활하던 중 단문창이 세상을 떠나자 이 두 친구는 작별을 고하고 온정균은 장안으로 가게 된다.
그런 온정균에게는 많은 별명이 있는데 온팔차(溫八叉), 온팔음(溫八吟)등의 별명이 있다고 한다.
특히 온팔차라는 별명은 과거 시험장에서 8번 팔짱을 끼니 8운 시(八韻詩)가 완성되었다고 하여 온팔차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시를 잘 완성시키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별명인 것 같다.
온팔차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는 음률(소리와 음악의 가락)에 정통하고 글을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났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소행이 좋지 않았으며 평소에 권세가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것을 좋아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술을 매우 좋아하여 가루기관(歌樓妓館)을 드나들며 방탕한 색정의 생활을 일삼았고 술에 취한 뒤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온정균을 권세가들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반권력적인 행동을 하는 이를…달갑게 느끼지 않았다.
반권력적인 그는 당시 재상들에게 많은 미움을 많이 받아 과거 시험에서도 여러 차례 낙방하였다고 한다.
그런 방탕한 색정인 그의 벼슬은 절도부사관, 국자감조교(國子監助教) 등에 그쳤다고 한다.
중국문학사에 기여한 온정균의 사
방탕하고 반권력적인 행동을 했지만 화려한 그의 시와 사에 대하여 조금 더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온정균은 중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중국문학사에서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 중에 하나는 평론가들은 그를 화간파 (花間派)의 비조 (鼻祖= 어떠한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라고 평가를 했는데
그러한 이유가 화간파의 비조는 사의 풍격이나 성격 등을 규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 작품이 바로 ≪화간집(花間集)≫이다.
이런 화간집에 온정균의 사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단련되어 관심이 없어했던 문사들까지도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몇몇 일부의 시인들은 민간사의 형식을 빌려 사를 만들기도 했으나 온정균 그는 자시의 음악적이고 화려한 재능을 살려 여러 개의 사조를 만들어냈고 그 사의 형식과 내용은 하나의 문학 양식으로도 인정받게 된다.
문학 양식으로까지 인정받게 된 온정균의 사를 창작하는 그 재능은 다른 누구보다 훌륭했다.
그럼 이제 그가 뛰어났다고 하는 사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사(詞)는 시보다는 많이 생소한 단어인데 시와 비슷한 운문으로 당 중대에 민간에서 발생해 송 시대에 가장 번성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문학 양식 중에 하나이다.
민간 가요에서 시작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장단이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가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는 창작을 할 때 일정하게 정해진 악보인 사조에 가사를 채워 넣은 방식으로 지어진다고 한다.
이제 그의 사조와 문체에 대해 알아보자.
그의 사조(시문의 문채나 말의 수식)는 화려하면서 농염하였고,
문채(문장의 멋)와 성정(천자(天子)의 심정)에 기대어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것에 대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변문(騈文)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변문은 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한 한문 문체인데, 4글자로 된 구와 6글자로 배열된 구라고 해 사륙문 (四六文)이라고도 불린다.
문장 전편이 대구(對句)로 구성이 되어있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문체이다.
온정균 시의 특징
이제 그의 시에 대해 알아보자
그의 시는 주로 여성의 감정이었으며 특히 여인들의 아름다운 자태나, 애정, 육감 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여리고 화려했다.
그의 방탕한 색정의 생활이 그의 삶은 사 창작에 직접적이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리고 화려한 시는 듣는 이로 하여금 "따사롭고 색채가 풍부하게 가득한 관능적인 세계를 느끼게 해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 시에서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표현한 것 이외에도 당나라가 해체되어 가는 시기의 시정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잘 표현했다는 라는 평이 많다.
화려하게 꽉 찬 표현으로 스러져가는 육조(六朝) 문화(중국에서 후한이 멸망한 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양쯔강 남쪽에 있었던 여섯 왕조)에 대한 동경과 석춘(惜春=끝나가는 봄을 아쉬워함)의 정(情)등도 노래하였다.
온정균은 화려하고 색채도 풍부한 글을 쓰는 작가였을 뿐 아니라 그는 창작에 상당한 역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다.
온정균 생시에 이미≪악란집(握蘭集)≫3권,금전집(金荃集)≫ 10권, ≪시집(詩集)≫ 5권, ≪한남진고(漢南眞稿)≫ 10권이 있었고, 단성식이라는 사람과 같이 엮은 시문합집(詩文合集)으로 ≪한상제금집(漢上題襟集)≫ 10권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 나오는 단성식이라는 사람이 낯이 익을 것이다.
단성식은 비각(秘閣= 왕실에서 문서와 서적을 보관하는 내각으로 왕실도서관의 기능을 하는 기관)에 있는 책을 다 읽었다고 하여 박학(博學)이라는 영예를 안은 학자이다.
우리가 단성식이라는 사람이 익숙한 이유는 바로 단성식은 온정균의 부친의 친구인 단문창의 아들이다.
훌륭한 두 작가가 커서 다시 재회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이렇게 열정적으로 창작한 이 작품들이 모두 전하지는 않는다.
지금 온정균의 시사는 ≪화간집≫, ≪전당시(全唐詩)≫, ≪전당문(全唐文)≫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렇게 중국 문학사에 유명한 시인 온정균에 대해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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